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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전문가 박종부 총감독의 이벤트 인생 30년의 스토리
박종부총감독 이벤트 인생 30년 삶의 스토리
● 즐겁게 놀며 고소득을 올리는 직업이라는 말에 끌려 레크레이션 강사로 이벤트에 입문
이벤트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1985년 군 제대 이후 1986년 4학년에 복학해 이벤트에 입문한 후 30여 년 동안 이벤트 관련 한 길만을 걸어왔다. 체육대학을 다니던 시절, 선배들이 기업·산업연수에 많이 종사했는데 그 덕분에 기업·산업훈련과정 중 극기 훈련 교관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당시 힘들었던 야간 산악훈련을 끝내고 긴장을 풀어준다는 의미에서 밤에 캠프파이어를 했다. 캠프파이어는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진행했는데 강사 비용이 1~2시간 진행에 30만~40만 원이었다. 그때 당시 기업의 월급이 약 40만~60만 원이었으니 상당한 고소득이었다. 즐겁게 놀고 고소득을 올리는 직업이라는 점에 매료되어 난 1987년 1월 레크리에이션 강습을 받고 본격적으로 전문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MBC 여름·겨울 스키캠프 등 많은 캠프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메모를 해가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진행을 할 수 있는 자질 보강과 운영 매뉴얼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서 무보수라도 참여만 시켜줘도 고마웠다. 친하지 않은 선배들은 혼자가 편하다고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성실함과 부담 없는 조건을 내세워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나의 기량을 닦아 갔다.
● 첫 직장인 현대훼미리타운에서 나와 독립을 선언하다
1997년 가을, (주)현대훼미리타운에 입사해 이벤트와 레포츠 담당으로 약 2년간 근무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포장마차라도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회의 경험과 직장생활의 경험을 쌓고자 취업을 한 것이었다. 직장에서 전국의 관광과 레저, 리조트, 워크숍 등에 관련된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콘도미니엄 회원권 판매도 하게 되었다. 회원권 판매는 체인망 계획을 세우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었는데 잘되면 비전이지만 잘못되면 사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회원권의 판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크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민하던 시간에 다른 동료들은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갈등만 하다가 이 회사를 그만둔다면 다른 회사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나의 정착지는 없을 것이다. 매번 남의 탓만 하고 변명만 할 것 아니겠는가? 나의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어디를 가든 포기하지 않고 성공하고 내가 여건이 될 때 떳떳이 회사를 나갈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영업이 쉽지 않았다. 주변에는 돈 많은 사람도 없었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지인조차 없었다.
나는 충주 면단위 소재 시골에서 5형제 중 막내로 자랐다. 늦둥이로 태어나 거의 혼자 놀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장했기에 새로운 문화를 접하지 못하고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학업을 위해 서울 큰 형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문화 차이를 느꼈다. 조카들은 샐러드를 좋아했는데 나는 시골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라 입맛에 맞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거의 밥과 국이 아니면 사탕, 콜라 등이 전부였고 칼국수 만들고 남은 꼬랑지를 구워 먹는 게 최고의 군것질이었다. 부모가 젊은 아주 소수의 아이들은 유치원을 다녔지만 나는 유치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못 사는 형편은 아니었다. 면에서 TV를 최초로 구입했고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님을 따라 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굶는 친구들이 많았다. 운동화는 잘 사는 집안의 전유물이었고 우리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보리밥이 건강에 좋으니 혼합 밥을 먹으라고 권장하며 매일 도시락 검사를 했다. 검사를 하지 않아도 대다수가 쌀밥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난 막내라는 권한으로 혼밥을 하면 보리쌀을 걸러내고 가능한 쌀밥을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온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콘도미니엄 판매 사원이 된 것이다. 여행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구매자들을 만나야 콘도미니엄을 팔 수 있을 텐데 많은 이런 사람들을 찾는 것이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이 어려웠다. 마땅히 방문할 곳이 없어 전화번호부를 구입해 압구정동 등 부자 동네 아파트 주소를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또한 대학 동문 수첩을 구입해 좋은 회사를 다니는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뛰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난 호텔 레스토랑 등에서 처음으로 돈가스와 비싼 커피를 먹어보았다. 한참 먹을 때라 고객과 돈가스를 먹고 나면 금새 배가 고파 나와서 다시 식사를 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난 나름대로 정착이 되었고 고객도 꾸준히 유치해 소개를 받기도 했다.
그때 당시 콘도미니엄 1개를 판매하면 40만~60만 원의 수당을 받았다. 한 개를 판매하면 한 달 월급 정도의 수입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매일 300여 통의 전화를 돌리며 열심히 노력했다. 공치는 달도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한 달에 몇 개의 구좌를 판매해 수입을 올렸다. 내가 노력한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내 사업을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힘은 들지만 영업에 대한 메리트를 느꼈다. 영업 쪽으로 활동하다 보니 일정 월급만 받는 사무직은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고소득을 올린 날은 친구들과 어울려 기분을 풀기위해 술집을 찾았다. 그런데 새벽까지 술을 먹다보면 그 다음날 리듬이 깨지고 한번 깨진 리듬은 몇 주씩 이어졌다. 이때의 안 좋았던 기억으로 지금까지 리듬이 깨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다.
우스갯소리로 80년대 초에 명성콘도(지금의 한화리조트)가 생기면서 강남의 룸살롱의 술값은 명성콘도 영업사원들이 모두 올려놓았다는 말도 있다. 회사 생활 2년 동안 관광과 이벤트 등의 업무와 콘도미니엄 회원권을 판매해서 나름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관리직으로의 이직을 권했지만 관리직은 영업에 대한 메리트도 없고 대인관계에 있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1989년 5월 퇴사하고 독립을 하게 되었다.
● 상품의 가치를 높여 고가로 팔 수 있는 방법을 배우다
현대훼미리타운 재직 기간에 영업을 배웠다. 무형에서 유형상품을 만들어가는 방법론을 배운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마케팅 중 포장술에 단가가 정해진다고 본다.
고객에게 선물하기 위해 홍삼을 구매한 적이 있다. 그런데 구매 장소에 따라 가격이 5배 이상 차이가 났다. 홍삼은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일반 슈퍼마켓, 백화점 등 여러 장소에서 판매를 한다. 난 파는 곳에 따라 홍삼의 질이 차이가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상품 자체보다는 포장술과 판매 장소에 따라 금액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산지부터 판매지까지의 유통과정에서 수십 배의 금액 차이가 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명품 백화점에서 구매는 상품의 질에 대한 믿음도 있겠지만 판매 장소에 대한 품격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판매 장소와 판매 과정을 잘 알고 구매를 한다면 소비자는 저렴한 금액으로 구매할 수 있고 반대로 판매자는 높은 금액으로 판매할 수가 있다. 현대훼미리타운에서 콘도미니엄 회원권을 판매하면서 난 이런 포장술을 나름대로 터득했고, 지금까지도 어떤 상품이든 판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 새로운 도전 이벤트 회사를 설립하다
1989년 5월 현대훼미리타운에서 퇴사한 후 1989.6.19. 부일레크기획이란 이름으로 이벤트사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비과세 사업자였다가 다시 과세사업자로 주식회사 부일기획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지금은 JB축제연구소, (주)제이비엔텀, (주)제이비컴즈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는 설립을 했으나 처음에는 막막했다. 그러나 야유회 레크리에이션으로 방향을 잡고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시작한 것이 기업체 부서별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영업이었다. 1~2년 사이에 많은 캠프를 운영했는데 주로 하던 것은 학단캠프와 유치원 여름캠프였다. 처음에는 받아서 운영하는 캠프를 하다가 차차 직접 영업을 뛰었다. 리조트 등과 연결해 전국의 학교 리스트를 정리해 학교 수학여행과 수련회 영업을 뛰었다. 난 그때 당시 선생님들을 상당히 존경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 말씀은 법 그 자체였고,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을 정도로 최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와 다른 신비한 존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회를 하면서 수련회의 내용과 질보다는 접대를 원하고 접대가 부족하면 수련회의 질에 대한 질타를 하는 모습에 환상이 깨졌고 환멸을 느껴 학교의 영업을 그만 두고 기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시 회사의 인지도와 노하우가 약해 큰 행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광고대행사의 하청을 받지도 않았다. 대다수 이벤트사가 광고대행사에게서 하청을 받으며 성장한 것에 비해 나는 지금까지 원청 만을 고집하며 영업을 뛰고 있다. 거의 하청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처음 이벤트 회사를 운영할 때는 대한민국에 이벤트란 단어가 없어 행사대행 사업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이벤트는 1980년대 초 프로야구 및 스포츠가 생기면서 치어리더와 응원문화의 이벤트가 생겼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실행하면서 좀 더 행사 이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 졌으며 1993년 대전엑스포를 통해 기업의 프로모션과 나레이터 모델 도우미들이 급성장하면서 공식적인 이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