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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풍부한 현장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박종부 35년 이벤트인으로서의 삶

*등록일 : 2022-04-14 *조회수 : 782회

이벤트인으로서의 삶 스케치

 

1. 이벤트 입문 동기

 

난 1985년 군제대 이후 1986년 4학년에 복학하여 이벤트 단어가 없던 시절 이벤트에 입문하여 오로지 이벤트 관련 업무만을 30여년 간 실행하여 왔다. 체육대학을 다니다 보니 선배들이 기업·산업연수에 많이 종사하였다. 기업·산업훈련과정에는 극기 훈련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교관아르바이트를 하에 되었는데 야간산악훈련 후 마무리는 보통 11:00~02:00에 힘들었던 산악훈련을 끝내고 풀어준다는 의미에서 캠프화이어를 하여 주곤하였다. 캠프화이어는 레크리에이션강사가 진행하였고 잠시 1~2시간 진행하여 주고 300,000~400,000원을 수령하여갔다. 그때 당시 기업의 급료가 약 400,000~600,000원이었으니 상당히 높은 고소득이었다. 즐겁게 놀아주면서 고소득을 올리는 것에 매료되어 난 1987년 1월에 레크리에이션 강습을 받고 본격적으로 전문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MBC 여름, 겨울스키캠프 등 많은 캠프에 참가하였다. 그때당시 처음에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무보수라도 참여만 하여주면 고마웠고 나는 메모를 하여가면서 진행에 따른 자질보강과 운영에 따른 매뉴얼 등에 대하여 올인하며 공부를 하였다. 친하지 않은 선배들은 혼자 다니는게 편하다고 무보수라도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난 성실과 부담 없는 조건을 내세워 쫓아다니며 나의 기량을 닦아 갔다. 

 

2. 첫 직장이며 마지막 직장인 현대훼미리 타운

 

1997년 가을에 (주)현대훼미리 타운에 이벤트와 레포츠 등의 담당으로 입사하여 약 2년간 근무를 하였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포장마차를 할지언정 내 사업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사회의 경험과 직장생활의 경험을 쌓고자 취업을 한 것이다. 직장생활하면서 전국의 관광과 레저, 리조트, 워크숍 등에 관여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콘도미니움의 회원권 판매에도 관여를 하게 되었다. 회원권의 판매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을 하게 되었다. 회원권판매는 체인망을 계획을 세우고 비전을 제시하는 회원권이었다. 잘되면 비전이고 잘못되면 사기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점이 제일 크게 갈등하였던 것이었다. 내가 갈등하는 시간 다른 동료는 판매하고 오는 것 아닌가? 난 내 사업을 한다고 관념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만 하고 있고 이 회사에서 그만둔다면 다른 회사에서도 자기변명에 그만둘 것이고 나의 정착지는 없을 것이다. 매번 남의 탓하고 변명만 할 것 아닌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난 나의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어디를 가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내가 여건이 될 때 떳떳이 나는 나갈 것이다 하는 신념으로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영업이 쉽지 않았다. 나의 주변에는 돈 많은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분도 없었다. 난 충주 면단위 소재인 시골에서 5형제 중 막내로 자랐다. 부모님과 나이차이가 많은 늦동이었다. 그런 관계로 문화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거의 혼자 놀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큰 형님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문화차이를 느꼈다. 조카들은 사라다를 많이 먹는데 난 시골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입맛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거의 밥과 비과, 사탕, 콜라 등의 과자와 칼국수 하면 꼬랑지를 구워 먹는게 최고의 군것질이었다. 젊은 부모를 갖춘 아주 일부분은 유치원을 다니었지만 나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못살은 것은 아니었다. 난 우리 면단위에서 우리 집이 최고로 먼저 TV를 구입하였다.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님을 따라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달라 하여 먹는 것이 최고의 낙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많은 친구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굶는 친구들이 많았다. 운동화는 있는 집안의 전유물이었고 우리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보리밥이 좋으니 혼합밥을 먹으라고 권유하였고 매일 도시락 검사를 하였다. 검사를 하지 않아도 대다수 집안이 쌀밥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난 막내의 권한으로도 쌀과 보리쌀의 혼밥을 하면 보리쌀을 걸려내고 가능한 쌀밥을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대학을 졸업하고 콘도미니움을 구입할 수 있는 분들, 나름대로 자금에 여유가 있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분들을 만나야 콘도미니움을 팔 것아닌가? 나와는 많은 문화차기가 있는 분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겪이 아니겠는가? 그 어려움을 가지고 다는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방문할 곳이 없어 난 전화번호부를 구입하여 압구정동 등 부자 아파트의 주소를 보고 무작정 전화콘택을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이것이 통하였다. 동문 수첩을 구입하여 좋은 회사 있는 사람의 주소록과 전화번호를 찾아 영업을 뛰었다. 그분들을 만나기 위하여 난 호텔 레스토랑 등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돈까스와 비싼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한참 먹을 때라 고객과 돈까스를 먹고 배가 고파 나와서 다시 식사를 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난 나름대로 정착이 되었고 고객도 꾸준히 유치하여 소개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당시 콘도미니움 1개를 판매하여 400,000~600,000원의 수당을 주었다. 한 개를 판매하면 한 달 급료정도의 수입이 생기는 것이다. 난 매일같이 300여 통의 전화를 돌렸고 참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다, 공치는 달도 있었지만 거의 한 달에 몇 개의 구좌를 판매하여 수입을 올리고는 하였다. 힘은 들지만 영업에 대한 메리트를 느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거의 나의 사업 같았기 때문이다. 난 내가 일한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영업 쪽으로 활동하지 일정 급료만 받는 관료직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순간에 고소득을 올리다보니 수입을 올린 날은 몇몇이 기분을 풀기위해 룸을 찾고는 하였다. 그런데 새벽까지 술을 먹다보면 그 다음날 리듬이 깨지고 한번 깨진 리듬은 몇 주씩 가게 되었다. 난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지금까지 리듬이 깨지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다. 우스갯소리로 80년대 초에 지금의 한화 리조트인 구 명성콘도가 생기면서 강남의 룸싸롱의 술값은 명성콘도 영업사원들이 모두 올려놨다는 말도 있다. 어떠하든 난 관광과 이벤트 등의 업무와 콘도미니움의 회원권을 판매하면서 2년 동안 나름대로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관리직을 원하여 난 관리직에 있다 보면 영업에 대한 메리트도 없고 대인관계에 있어 한계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래서 1989년 5월 퇴사하게 되었다.ㅋ

 

3. 상품의 가치를 높여 고가로 팔 수 있는 방법을 배우다

 

난 현대 훼미리 타운에서 영업이란 것을 배웠다. 무형에서 유형상품을 만들어가는 방법론을 배운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마케팅 즉 포장술에 단가가 정하여 진다고 본다.

고객에게 선물을 하기 위하여 홍삼을 구매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홍삼을 어디서 구매하느냐에 따라 가격은 5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홍삼은 여러 장소에서 판매한다. 즉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일반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 판매를 한다. 난 홍삼의 질이 틀리지 않을까 고민하였지만 내용의 질보다는 포장술과 판매 장소에 따라 금액이 정하여 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도 상품에 따른 경로를 보면 생산지와 판매지 과정의 유통과정에서 금액이 수십 배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명품 백화점에서 구매는 상품의 질에 대한 믿음도 있겠지만 판매장소에 대한 품격의 가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하든 판매장소와 판매과정을 잘 알고 구매를 한다면 저렴한 금액으로 구매할 것이다. 판매자는 높게 판매할 수 가있을 것이다. 난 여기에 따른 포장술을 현대훼미리 타운에서 콘도미니움 회원권을 판매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하였다고 본다. 어떠한 물건이든 거침없이 판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금까지 나는 가지고 있다.

 

4. 새로운 도전 이벤트 회사를 설립하다

 

난 현대훼미리 타운에서 1989년 5월 퇴사한 후 1989.6.19.일 부일레크기획이란 이름으로 이벤트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비과세 사업자, 다시 과세사업자, 다시 주식회사 부일기획으로 상호명을 변경하여갔고. 지금은 JB축제연구소, (주)제이비엔텀, (주)제이비컴즈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회사는 설립을 하였으나 막막하였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방향을 잡고 영업을 뛰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시작한 것이 기업체 부서의 야유회 레크리에이션 영업이었다. 처음에 주로 하였던 것은 학단캠프와 유치원 여름캠프였다. 1~2년 사이에 많은 캠프를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받아서 운영하는 캠프를 하였다. 그러면서 직접 영업을 뛰고자하였다. 그래서 전국의 학교리스트를 정리하여 학교 수학여행과 수련회의 영업을 리조트등과 연결하여 뛰었다. 난 선생님님들을 상당히 존경하였다. 그때당시 내가 생각하는 선생님은 우리와 다른 뭔가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 말씀은 법이고 존중이었다.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못을 박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회를 하면서 수련회의 내용 질보다는 도착하여 접대에 따른 것을 원하였고 부족하면 수련회의 질에 대한 질타를 하는 모습에 환상이 깨졌고 환멸을 느껴 학교의 영업을 그만 두었고 기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 회사의 인지도와 노하우가 약하여 큰 행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광고대행사의 하청을 받지도 않았다. 대다수 성장하는 이벤트사가 광고대행사에게서 하청을 받으며 성장한 것에 비하여 나는 지금까지 원천만을 고집하며 영업을 뛰고 있다. 거의 하청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처음 이벤트사를 운영할 때는 대한민국에서 이벤트란 단어가 없었다. 행사대행이란 사업으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벤트는 1980년대 초 프로야구 및 스포츠가 생기면서 치어리더와 응원에 따른 응원문화의 이벤트가 생겼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여 실행하면서 좀 더 행사이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 졌으며 1993년 대전엑스포를 통하여 기업의 프로모션과 나레이터 모델 도우미 등에 대하여 급성장하면서 공식적인 이벤트란 단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 이벤트문화에는 처음으로 문화엑스가 진행된 대적엑스포였다고 본다. 그전까지는 행사대행사란 명칭으로 거의 진행되었고 지금은 이벤트사란 이름으로 교류된다. 다양한 이벤트란 단어를 사용하다보니 좋은 곳 나쁜 곳 모두에서 이벤트와 도우미등의 명칭이 사용하다보니 좋지 않은 곳에 연루되는 모습도 불수 있다고 본다.

80년대에는 이벤트 학원이나 학교에서의 과정이 없었다. 난 스스로 연구하고 다른 행사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가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본다. 지금은 배우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면 많은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본다.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지만 열정은 옛날 같지 않다고 본다. 내가 배울 때는 인터넷이라는 것이 없었고 처음에는 타자기로 기획서를 만들었고 팩스로 제안서를 주고받았다. 또한 직접 방문하여 스케치하며 공부를 하였고 그런 자료 등을 자료로 보관하는 시절이었다. 자료가 자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에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배움도 청할 수도 있다. 지금은 자료로 보관하지 않는다. 모두 외장하드에 저장하여 보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내가 어렵게 확보한 자료를 신입이 와서 보기 힘든 자료를 USB 등에 쉽게 복사하여 빼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현대의 이벤트 줄기는 난 두 가지로 본다. 그 시대에는 거의 행사를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들이 하여왔다. 그러던 중 스포츠와 체육대회 등 응원문화가 생기면서 초창기 이벤트사들은 대학교 응원단 출신들이 참여하여 만들었고 레크리에이션회사들은 자기중심으로 수입이 이루어지기에 조직적인 기획팀의 인원조직이 잘 진행되지 못하였고 응원단 출신들은 경기소품 등의 임대와 인력에이전시를 통하여 기획과 연출전문회사로서 조직적으로 성장하여 왔다고 본다. 지금은 전시와 마이스 등 다양한 분야와 생겼고 학교에서 전문가들을 육성하고 있기에 새로운 패러디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본다.

 

5. 체육대회에 변화를 주다

 

난 체육을 전공으로 그동안 공부를 하였고 주 전문인 체육대회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체육대회 영업을

뛰고자 하였으나 기획능력과 노하우등이 약하였으며 회사의 인지도가 약한 관계로 작은 체육대회부터 진행하기로 하고 영업을 뛰기 시작하였다.

난 영업을 뛰기 위하여 매일경제 기업 연감을 구입하였다. 그래서 300명 이하 사업장 E급, 500명 이하 사업장 D급, 1,000명이하사업장 C급 3,000명 이하 사업장, B급 5,000명 이하, 사업장, A급 5,000명이상의 사업장으로 정하여 E급의 회사부터 영업을 뛰면서 실행을 하였고 E급의 인원에 따른 노하우가 축전되면서 D급의 회사로 돌렸고 그러면서 C급, B급,A급등으로 수준을 올려 체육대회를 진행하였다. 나중에는 전사 또는 그룹체육대회를 주 축제으로 기획, 운영, 연출을 하면서 체육대회 전문기획사로 도약을 하였다. 1995년 중반대 까지는 대한민국 10대 메이저 기획사로서 활동을 하였다고 본다.

처음 체육대회를 진행할 때는 체육대회대회 문화가 축구, 배구, 족구 등 구기의 토너먼트 체육대회로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거의 오전에 탈락된 팀은 오후에 할 일이 없어 술판이 벌어지고 싸움이 일어나는 체육대회로서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 되다보니 체육대회의 가치에 대하여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체육대회를 관여하는 추진자들에 대한 마인드는 체육대회 하면 축구, 배구, 족구 등을 해야만 체육대회라고 하는 인식이 아주 강하였다.

난 이러한 체육대회 문화를 전체가 일심동체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체육대회를 만들기 위하여 관계자를 설득하기 위하여 주력하였다. 그리고 응원을 강화시켜 처음부터 응원단장과 치어리더 및 응원소품을 가지고 함께 응원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구성을 하였다. 그래서 토너먼트의 경기는 가능한 줄이고 동시에 출발하는 명랑운동회 방식을 택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체육대회의 분위기를 잡으며 실내체육관에서 할 수 있는 체육대회를 추천하고는 하였다.

축구의 경기는 사전 경기를 통하여 결승만 하는 방법, 또는 다른 경기장에서 진행하고 메인행사장에서는 다 같이 어울리는 체육대회의 구성을 주도하였다. 아니면 청·백경기로 나누어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할 수 있는 경기구성을 주도하여갔다. 때에 따라서는 오전에 관람석에서 응원 구성 연출과 축구, 배구, 족구, 피구 등이 각 경기장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방법을 택하였고 오후에는 다 같이 할 수 있는 릴레이경기와 명랑운동회 성격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연출하였으면 또한 직원의 장기자랑과 축하공연을 섞어 끝까지 함께 어울려 진행할 수 있는 연출을 하여 호응을 받았다. 여기에 점차적으로 비젼 선포 등의 퍼포먼스를 넣어 자부심과 긍지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실내체육관에서의 진행은 우천에 상관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과 조명등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작품연출에 대하여 극대화 시켜 호응을 받았고 대한민국 체육대회 문화를 바꾸어 놓는데 일조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6. 응원대행 및 치어리더와 방송무용운영

 

나는 체육대회 전문기획사로서 체육대회를 활성화와 작품의 연출을 위하여 응원단과 치어리더를 직원으로 채용하여 직접 운영 하였다. 하루에도 10여 곳의 체육대회를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운영하고는 하였다. 그때당시는 치어리더 등은 대학교 응원단의 치어리더와 많이 조인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스포츠경기에 응원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전문적인 치어리더가 구성되어 전문 댄스 공연과 퍼포먼스의 공연을 펼쳐보기도 하였다. 이시기에 나는 아마추어 경기부터, 프로야구,프로축구,농구장,배구장,씨름천하장사 경기장등에서 구단의 응원과 연맹 및 협회의 일원으로서 응원 및 치어리더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또한 가수로 활동하였던 거리시인들의 노현태와 윤초원을 단장으로 하여 각 방송사의 무용단으로 활동하였고 가수 안무를 하였다. 벅, 김원준,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 디제이디오시, 유영진 등 수많은 가수들이 나의 연습실에서 안무를 통하여 데뷔하였고 탄생하여 대한민국 공연문화를 이끌어 갔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노현태 단장이 가수 안무를 하면 뜬다는 소문이 정설이 되어 너도나도 안무를 받기 위하여 연습실을 찾았다. 지금은 세계적인 SM이지만 90년대 당시에는 어려움을 겪었고 SM에서 잠시 근무하였던 박상묵이 회사로 입사하면서 SM가수들이 나의 연습실에서 가수안무와 연습을 받던 시대였었다. 지금은 그 당시 잘되기 시작하여 최고의 엔터테인먼스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나는 내가 운영하는 체육대회와 공연 및 방송연출을 하는데 있어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치어리더와 방송무용단을 직접 운영하였고 작품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7. 방송 TV 스포츠 빅 쇼 현장 총감독으로 활동하다

 

 난 오랫동안 체육대회 전문체육대회기획사로 활동하여왔다. 또한 프로야구,축구,농구,배구,씨름천하장사 등 스포츠경기 행사에서 메인 치어리더 이벤트공연과 각 구단의 시즌동안 응원대행을 하여왔다. 예를 들면 농구단에서 울산연고인 기아농구단을 오랫동안 대행하였다, 원주연고지인 나래의 응원대행을, 대구연고지인 동양의 응원대행 등 많은 구단의 응원대행을 하여왔다. 배구에서도 남자배구 삼성화재와 대한항공의 시즌 응원이벤트대행과 여자부 SK와 현대산업개발등의 시즌응원대행을 하였다. 그러던 중 뭔가 새로운 빅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난 SBS TV 스포츠국에 가서 그때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을 제안하였고 그래서 농구대잔치 전체의 구성과 현장 총감독으로서 연출을 하였고 그 작품이 최고의 작품으로 찬사를 받으며 시청률을 높였다. 난 그때당시 최고의 인기를 올렸던 농구의 올스타전을 프로로 전향해서도 오랫동안 올스타전을 연출하였다, 그때당시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을 섭외하여 거의 모두를 출연시켰다, 가수들도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올스타전경기에 출연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던 작품이었다고 본다. 난 현장에서 연출을 먹고 사는 연출전문가이다. 올스타전에는 사전행사(함께 어울리는 명랑운동회게임), 식전행사(치어리더 경연대회), 올스타전 개막퍼포먼스(개막퍼포먼스, 입장식연출) 경기진행, 휴식타임이벤트(3점슛 경기대회, 덩크슛 대회 등)의 방송이벤트를 연출하면서 중간 중간에 CM이 있지만 나는 현장의 리듬을 깨지 않기 위하여 CM타임에도 현장 이벤트를 넣어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도록 구성, 연출하였다. 지금까지도 생방송경기에서 이러한 연출을 하는 연출자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연출에 있어 인정을 받아 KBS에서 방송하고 있는 슈퍼리그 개막식에 있어 연출과 프로축구, 프로야구 올스타전과 씨름천하장사의 올스타전과 빅이벤트 등을 오랫동안 현장방송연출을 독점으로 활동하면서 그 외 태권도, 핸드볼 등 많은 스포츠에 생방송 중계를 섭외하여 총연출하고는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생방송을 하면서 방송에 대한 전문성과 틈새를 알게 되어 거의 독점으로 진행하였고 다른 자가 나의 작품을 따라오지 못하는 노하우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당시 박종부 하면 스포츠. 스포츠 하면 박종부로서 거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활동하였던 시기였다고 본다.

 

 

8. 사직체육관에 지붕을 덮다

 

오랫동안 스포츠 방송현장 연출을 하면서 프로농구가 탄생하면서 기아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의 개막식과 시즌이벤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때당시 기아엔터프라이즈농구단의 연고지는 부산사직실내체육관이었다. 기아농구단이 오랫동안 우승을 하였고 그때 당시에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개막식과 기아엔터프라이즈의 탄생의 퍼포먼스를 함에 있어 거대한 엔터프라이즈 배가 입장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함에 있어 낮 2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직체육관의 지붕은 유리로 되어 있어 낮 2시에는 밝은 실내체육관인 관계로 어둠을 만들기 위하여 체육관의 천장을 덮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지붕을 덮자고 관리실에 찾아 갔지만 보안과 안전관계로 설득을 하였지만 대통령 행사 때에도 지붕을 덮지 못하였다. 그러니 덮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오랜 설득과 보안문제는 나의 뒷조사를 모두 하여라 내가 직접 덮겠다, 그리고 파손에 대한 보상에 대하여는 책임지겠다고 설득한 상황에서 허락을 끝내 받았고 직접 실측하기위하여 지붕에 올라갔다, 그러나 40~50M 높이의 지붕에 올라와보니 참으로 허허벌판의 바람과 아찔하였다. 그러나 어떡하겠나 부산MBC와 TV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역사적인 개막식에 있어 작품을 만들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하여야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게 하여 덮기로 하고 고민하던 중 관리실에서 연락이 와서 예전에 지붕을 덮은 팀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 연락처를 받아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금액의 단가의 제시를 받았으나 나는 새로 물품을 구입하여야 되지만 그쪽은 덮을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인건비와 소정의 수입은 주지만 허무맹랑한 금액은 줄 수 없다. 그냥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협상을 하여 의탁하게 되었고 난 지붕을 검은 천으로 덮은 상태에서 최고의 작품연출로 보담을 하였다.

 

9. 신촌문화축제를 서울 대표축제로 만들다

 

난 그동안 체육대회 전문기획사로서 활동하여왔다. 스포츠 빅쇼를 하면서 방송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 왔다, 그러나 다른 장르의 행사에 접근하고 싶었다, 바로 기업 프로모션의 행사를 전문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동안 진행하였던 체육대회는 총무과 소관이다, 그러나 프로모션의 판촉행사는 판촉과나 홍보과 또는 마케팅과에서 하고 있었으나 나는 체육대회 전문기획사로서 총무과를 주로 상대하였다. 에를 들면 신한생명체육대회를 오랫동안 하였다. 신한생명 외에서 대다수 보험회사의 체육대회를 우리가 하였다. 체육대회하면 부일기획이란 인식이 강하였다, 연도시상식을 하기위하여 연도시상식을 진행하는 영업관리과에 영업을 가면 부일기획은 체육대회 전문기획사인데 연도시상식까지 하려고 하느냐하는 말을 하곤 한다, 너무 체육대회전문기획사라는 인식이 강하여 이러한 인식이 탈바꿈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995년에는 서울에서 최고의 축제라고 하면 상가번영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명동축제와 한참 투자를 하면서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대학로 축제였고 신촌대학가 일대에서 펼쳐지는 신촌문화축제가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1~3회까지 기획사가 협찬을 받지 못하여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여 기획사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컸던 상황이었다. 그 시대의 이벤트는 거의 백화점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외는 그렇게 활성화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난 그때당시 체육대회관계로 그레이스 백화점(현재 현대백화점)과 교류가 있었다. 신촌문화축제는 대학가 상권이란 특혜로 시비와 서대문구비의 5천만 원을 지원하여 주고 1억5천만 원을 협찬 받아 2억짜리 축제를 진행하여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기획사가 협찬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축소하여 진행하는 관계로 서로 불신이 상당히 컸던 것이다. 신촌문화축제를 주최하는 서대문구에서도 이벤트에 대한 마인드가 부조하여 그레이스 백화점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레이스백화점 전무이사가 축제위원회에 고문으로 참가하여 진두지휘하였다, 위원회에서는 그레이스백화점에 이벤트사 추천을 의뢰하였고 전문이사는 총무과에 추천을 받아 부일기획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농구올스타전을 총감독하고 있는 이벤트사라면 신뢰성으로 모두 통과가 되는 시기였다. 나는 결정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레이스백화점에서는 부일기획을 위원회에 추천을 하였고 위원회는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부일기획을 잘 아는 것처럼 서로 추천을 하고 합리화 시켜갔다, 진작 나를 만나위원은 없었지만 최고의 인기이벤트를 연출하고 있는 부일기획과 함께 한다는 명분을 만들어놓고 기정사실로 정하여 놓았다. 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축제를 할까말까 하는 고민 속에 이번에는 수입을 남기는 어렵고 약간의 적자를 보더라도 협찬을 받으며 거래처를 많이 만들어놓는다면 차후에 새로운 거래처에서 매출을 올린다면 소득 아닌가 하는 생각에 허락을 하고 신촌문화축제를 하게 되었다. 앞전에 기획사들이 협찬에 실패하여 불신 속에 축소하여 진행한 축제. 나도 협찬을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어려웠다. 그래서 난 명분을 남기기 위하여 약 2억 정도를 투자하며 오히려 5억 규모의 축제로 만들어 성황리에 끝냈고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학로축제와 명동축제를 잡고 최고의 축제로 만들면서 최고의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그때당시 스포츠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부일기획이었으나 신촌문화축제를 인하여 다시 최고의 축제기획사로 거듭태어 나게 되었다. 난 적자를 보게 되는 경우에는 자기자본을 투자하여 명분과 신뢰를 높이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업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2억 원 이상의 협찬을 받으면 협찬사에게는 신촌 거리의 현수막과 가로등 베너, 아치, 무대 등에 기재와 무대퍼포먼스 및 부스운영권을 주었다. 1995년에는 메인 협찬사에게 크게 협찬사를 기재하여야 하지만 메인 협찬사를 잡지 못하여 부일기획이 메인협찬사가 되었고 메인 협찬사 자리를 삼성신용카드와 카스 등에게 메인 협찬사 광고 면을 주었다.1996년도에 제5회 신촌문화축제를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에도 협찬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년도에 메인 협찬사 자리를 1996년의 협찬을 위하여 메인협찬사광고면을 주었지만 별로 인상이 되지 않아 그냥 부일기획이 메인 협찬사 광고를 하게 되었다. 주최 측인 서대문구에서 우리에게 너무하지 않냐. 모든 광고에 부일기획의 광고가 되고 있지 않냐. 어떻게 기획사의 광고로 모두 채울 수 있느냐는 가벼운 항의였다. 난 이런 말을 하였다. 저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구에서는 5천만 원 주고 2억 이상의 축제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고 난 메인 협찬을 잡지 못하여 돈 벌러 온 기획사가 메인협찬사가 되어 광고를 하고 있는 심정을 알고 계시는가. 이런 말을 하였고 그 담당 공무원은 아무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어떠하든 난 그 축제를 성황리에 끝냈고 그 당시의 인지도로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서울어디를 가든 외상이 되었고 음주운전이 걸려도 명함만 주면 통과되는 시절이었다,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그만큼 인지도가 높은 축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때에 투자하였던 적자의 후유증이 있었지만 작품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컸기에 적자를 보면 내 돈이라도 투자하여 멋진 작품을 만들어 호응과 신뢰를 받는 낙으로 사는 연출감독이 되어 아직도 그 마인드로 살다 보니 가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는 한다. 결론은 이건으로 삼성신용카드의 새로운 사명의 선포식을 수주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신촌문화축제를 두 번하면서 협찬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기획사에서 자체투자를 하면서 최고의 축제를 만들어났더니 그다음에는 오히려 돈을 내면서 축제를 하여 주길 바라는 관계로 두 번하고 그만 두었다.

 

10. 부일기획 빅 스포츠 타이틀 스폰서 하다

 

오랫동안 SBS 스포츠국과 함께 협찬을 대행하여 주었고 같이 스포츠 빅쇼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SBS 아이스하키 대축제의 경기에 있어 메인 협찬사에 대한 유치를 요청하였다. 난 고민하다가 2일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빅경기에 대한 타이틀 스폰 2억 정도는 무난히 받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협찬사가 5천만원정도의 제안을 하여오는 것이 아닌가? 난 그 돈 받지 않는다고 하고 내가 메인협찬사로서 투자하고 기획, 연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부일기획컴 SBS아이스하키 대축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광고대행사나 이벤트사가 빅스포츠에 있어 메인타이틀 협찬사가 되어 스폰을 댄 경우는 없다, 난 큰 끔이 있기에 나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한쪽에는 있다고 본다. 메인타이틀 스폰사가 되어 입장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첫날 개막식에 인기가수를 동원하였고 이틀째에도 SBS 라디오 공개방송을 유치하여 가수들을 많이 출연시켰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많은 공부를 하였고 이러한 노하우와 신뢰가 지금까지도 나를 지탱하여 주고 있다고 나는 자부한다.

 

 

11. 공개방송 전문대행사 부일기획

 

난 KBS, MBC, SBS 등의 TV 생방송 현장 연출 총감독으로 많은 연출을 하게 되었고 SBS Radio등 각 방송사와 공개방송 특집을 하면서 방송에 대한 섭리 및 연출대행에 대하여 터득하게 되었다. 공중파의 TV 생방송과 특집쇼 방송 및 케이블 개국쇼 및 지방 방송국 개국쇼 및 특집방송을 연출하면서 전국의 방송사의 대행을 하였다. 또한 스포츠와 특집공개방송, 축제에 특집공개방송을 연결하여 극대화 시켰다.

방송사에서는 자체 제작비로만 진행하여 왔었지만 부일기획에서 협찬을 받아 줌으로서 방송사에서는 한 프로그램을 얻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지자체의 축제나 스포츠에서는 공개방송을 통하여 홍보와 인기가수를 출연시킴으로서 현장의 분위기를 극대화 시켰다, 난 방송사에서 협찬사로서의 대우를 받았고 지자체의 축제에서는 저렴한 금액으로 공개방송을 유치하여 줌으로서 예우를 받으면서 활동하였다. 또한 야외 특집공개방송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방송사에게는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여줌으로서 모두에게 만족도를 높여 주었다, 이벤트, 프로모션, 방송, 축제 등 다분야의 풍부한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로서 모두에게 만족도를 극대화 시켜주었다. 

2000년 태백산 눈축제를 방문하였더니 4백 가수 3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조건을 걸었다. 15,000,000원을 주면 가수 15팀과 TV예고 스파트 30회를 하여주겠다고 그런 상황에서 수주하여 그대로 연출을 성황리에 하여 주었다. 도민체전에 있어 관객을 강제 동원에서 자립적인 관람를 시키기 위하여 저렴한 금액으로 공개방송을 유치하여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제안을 하였고 도민체전 등에 최초로 공개방송을 도입하여 정착시켰다, 그러나 공개방송을 유치하여 연결시킴에 있어 방송의 섭리나 현장에 대한 연결성 부족으로 제대로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 모습니다. 20년 넘게 전국의 축제를 총감독하고 전국의 방송사와 조인하여 현실에 맞게 연출을 하여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는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전문대행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고주와 방송사와 조화롭게 연결하여 최고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12. 나는 매번 하는 퍼포먼스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이벤트로 감동을받다

 

나는 30여 년 동안 수많은 행사를 연출하여 왔다. 체육대회를 수천 회 총감독으로서 연출하였다, 다양한 주제공연에 있어 소품을 가지고 수천 회 연출을 하였다. 난 매번 똑같은 소재와 소품 등에 있어 색다르게 하고 싶지만 거의 비슷하게 연출하는 경우가 있고 거기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항상 바꾸고자 한다, 제안서, 운영에 있어 수천 회를 연출하였기에 몸에 배여 있다, 그러다 보니 짧은 시간에 제안서를 작성할 수가 있다, 빠른 시간에 제안서를 광고주에게 제출하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제안서를 작성할 수가 있냐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난 하도 많이 하였고 나에게는 식상해서 또 하고 싶지 않은 작품의 연출들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만난 관객은 그것에 대하여 환호를 한다, 난 매번 본 작품으로 실망스럽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작품이고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난 전문 연출가로서 매번 대한민국 최고인 소재를 가지고 새롭게 작품을 만들어 가는 꿈을 꾸고 있다, 무주군과 강원도가 동계올림픽을 유희하는데 있어 경쟁을 하였다, 무주가 먼저 신청을 하였으나 강원도가 신청권을 가지고 갔다, 강원도가 유치를 하지 못한다면 그다음유치권은 무주가 같기로 하였다, 그러나 떨어진 상태에서 무주군과의 약속을 버리고 강원도가 다시 유치권에 도전을 하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무주군은 무주에서 서울을 거쳐 강원도청으로 도보행진을 하였다, 난 도보행진에 있어 모든 이벤트를 하였고 서울평화의 문 광장에서 약속지키라는 의미에서 약속의 손 ABR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 작품 연출이 나는 여러차례 하였지만 무주군민에게는 처음으로 보는 퍼포먼스로서 감동을 가졌고 그 감동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13. 두류공원 야외 음악당 기공식

 

1990년 말 나는 코오롱의 체육대회 등 여러 가지의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구의 두류공원 야외 음악당을 건설하여 대구시에 기부하는 공사에 대하여 기공식을 하러 7월에 내려갔다. 대구에 내려갈 기회가 그동안 많지 않았다, 기공식을 하기 위하여 대구두류공원일대를 찾았다. 참으로 덥다, 더워도 너무 덥고 서울에서 생활한 나는 7월달의 무더운 기온을 그렇게 겪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구사람들은 이 더위가 무엇이 덥냐는 말을 한다, 대구의 기온과 서울의 기온의 차이가 높다고 본다,

우리는 웃통을 벗고 배너와 현수막 설치 등 다양한 이벤트물을 설치하며 기공식을 마치였지만 참으로 더위가 높다는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14. 음반제작과 IMF를 겪으며

 

인기 스포츠에 있어 현장연출 총감독으로서 생방송을 하면서 브릿지에 가수 공연을 많이 하였다. 가수를 섭외하고 많은 매니저들과 함께 하였다. 그때 당시 항상 매니저들이 옆에서 형님 음반 제작 한 번 하시죠 하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난 언젠가는 음반제작을 하고자하는 꿈을 꾸어 왔다, 그러던 중 매니저들의 권유에 음반제작을 하기로 하였고 나는 그동안의 인맥을 통하여 제작을 시도하였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수들을 캐스팅하고 곡을 받아 제작을 하였다, 다른 엔터테인먼트 사들에 비하여 내가 가진 영역의 노하우와 여건을 가지고 있으나 내가 음반제작에 있어 전면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하고 있는 이벤트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방송대행사로서 많은 공개방송을 대행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방송사와 연결이 되어있으며 주변의 방송인적자원이 있어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고 관리를 하지 못하다보니 내부의 문제에 봉착하고는 하였다, 내부에서 썸씽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하여 제작 발표에 앞서 몇 번 멤버를 바꾸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후회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한번 빼어든 칼 썩은 무라고 베고 싶었다, 망하든 성공하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많은 공부를 하고 다음에는 제대로 하여봐야지 하는 마음도 가졌다, 그래서 결론은 음반이 나오고 나의 방송행사부터 여럿 방송을 하였고 직접 전국의 방송사를 돌며 노하우를 쌓고 인맥형성을 하여갔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지 면에서 그때의 경험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때 IMF를 맞으면서 더욱더 어려운 제작경험을 겪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하고자 하오나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싶다. 

 

15. 전국 도(시) 군(시·구)민 체육대회에 변화를 주다

 

스포츠와 체육대회를 전문적으로 총감독하면서 도민체전에 있어 총감독제도를 도입하여 실행하였다. 난 도민체전이나 전국체전을 진행함에 있어 아침 10시에 사람도 없는 관중과 인원을 동원하여 관중석을 채우는 것에 있어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간에서 야간으로 시간을 옮기고 작품을 만들고 동원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의 체전으로서 문화체전으로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선례가 없는 시간대로 옮기는데 있어 이해를 하면서도 옮기는데 대한 두려움을 담당 공무원들은 가지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고 시간대 옮기는 것에 대하여 이해를 하면서 옮기는데 대한 장·단점에 대한 데이터를 원하기 시작하였다, 난 그런 자료를 넘겨주면서 보필하여 지금의 도민체전과 전국체전이 야간대로 시간 변경 되는데 있어 일조를 하였다고 본다. 또한 엘리트체육대회에서 문화체전으로서 선수와 지역민 등 모두가 함께 즐기는 문화체전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점차적으로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 시간대와 운영시스템 등에 있어 많은 변화를 주는데 일조를 하였지만 현재의 도민체전은 사전행사, 식전행사, 개막식, 식후행사 등의 구성과 연출에 있어 변질이 되어 콘덴츠에 대한 구성이 엉크러졌고 단조로워 졌다, 여기나 저기나 모두가 깃발 들고 멀티쇼로 진행되고 있다, 돈은 쓴 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체육대회 개막식의 현 모습이라고 본다, 난 다시 한 번 체육대회에 있어 새롭게 진정한 화합의 문화체육대회로서 본질성을 가지고 구성, 연출이 되길 바라면서 노력을 하고자 한다.

 

16. 장소대관이 안되면 박종부를 찾아라

 

난 체육대회 전문기획사로서 항상 장소를 확보하여야 되었다. 직접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영업을 뛰었지만 오랫동안 운동장과 실내체육관등과의 유대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운동장과 실내체육관의 대관자료를 둘려보고 예약된 기업에 대하여 영업을 뛰고는 하였다, 지금은 많이 늘어난 운동장과 실내체육관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활용할 수 있는 운동장과 체육관에 있어 한정되어있었다. 그런 관계로 매번 체육대회를 진행하는 회사는 전년도에 미리 예약을 하여 진행 하였다. 난 그 자료로 기업에 영업을 뛰었고 그 예약상황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취소될 확률을 있는지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데이터로 장소대관에 있어 연결을 하여 주고는 하였다.

한번은 FAG가 그룹체육대회를 진행함에 있어 마산에서 전진대회를 진행하고자 하였으나 장소를 구하지 못한 태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나에게 장소를 대관하여 주면 그때당시 2억 규모의 전진대회의 이벤트체육대회의 대행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난 알아보겠다고 하고 나와 장소를 수배하였다 그리고 마산 실내체육관을 섭외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섭외가능하다고 하고 수주하였다, FAG담당과장은 나에게 실례되지 않는다면 상황을 물어봐도 되겠나. FAG가 창원에 공장 등이 있어 대관을 그렇게 수배하였는데도 수배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관을 할 수가 있었나하는 이유였다. 방법은 이러하였다. 내가 마산실내체육관에 전화를 하여본 결과 전날 1천 여명으로 구성된 작은 대회가 있었다, FAG는 전진대회를 하기위해서는 행사날만이 아니고 사전에 준비할 날짜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전날에 행사가 잡혀 있는 관계로 대관이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예약단체에게 전화를 하였다. 두 지 방법이었다, 그 단체가 진행하는 전날에 있어 내가 사전에 FAG의 설치물을 설치하여 놓고 그 날의 행사를 모두 하여 주는 방식과 아니면 그 대회는 돈이 아쉬웠기에 협찬금을 대주고 날짜 사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들이 가능하였다 그러하기에 방법론으로 장소를 대관하였고 몇 년 동안 FAG행사를 진행하였다.

또 한번은 삼성카드의 CI발표였다. 난 삼성카드 프로모션팀과 협찬을 하여주면서 신촌문화축제를 같이하면서 나에 관계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삼성카드 CI발표는 장소가 정하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날자가 정하여졌고 연하라로 등 여러 이벤트사가 PT를 통하여 연하나로로 선정이 되었다. 그러나 장소 섭외가 안되어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난 그 당시 기아자동차 하계휴양소이벤트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8월초에 삼성카드 프로모션팀에서 전화가 와서 장소를 구하여 주면 삼성카드 CI발표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장소를 알아보겠다고 하였고 전화 몇통 돌려서 장소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장소가 가능하다고 하였더니 그럼 빨리 올라오라고 하였지만 난 행사 중이라 행사 끝나고 올라간다고 하면서 약속을 잡았다, 행사가 끝나고 삼성카드회사를 방문하였더니 임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이때가 8월이고 9월에 삼성신용카드에서 삼성카드로 CI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부일기획의 능력을 믿는다 5일간의 제안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지만 5일만에 그 큰 행사의 제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에 있어 촉박한 점이 있어 나는 연하나로에 제안하였다, 연하나로에 제안은 내가 장소를 섭외하여 주고 선정된 제안서로 공동으로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연하나로에서는 포기한 행사를 같이 수주하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부일기획의 원하는 데로 하여주기로 하였다, 그다음회의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여 시간관계상 조인하여 같이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은 것 같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소개하여준 프로모션팀에서는 주는 행사도 왜 단독으로 하지 않느냐는 핀잔을 받았다. 그렇게 하여 함께 진행하는 과정에서 CI발표는 잘 끝났지만 연하나로의 배신으로 배분의 과정에서 별로 좋지는 않게 마무리 되었다, 대관에 있어 방송사 등 많은 행사들이 장소를 구하지 못하면 항상 나에게 연락이 오고는 하였다, 이런 관념에서 난 많은 행사를 진행하였다.  

 

17. 디스크 수술전날까지의 현장 연출하며 목표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하여 정신적으로 살아왔다

 

나의 꿈은 60살 정도까지 1천억 원을 벌어 나의 고향 충주에 초, 중, 고, 대학교를 세계적인 예술학교와 체육학교을 세워 인재를 육성하고 매니지먼트회사를 세워 학교에서 성장하는 인재를 세계시장에 내어 인재를 육성하고 판로를 내세워 세계적인 학교로서 학습을 위하여 충주로 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운영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능력은 있으나 사정이 어려워 육성되지 않는 인재를 대신 육성하여 세계적인 바이올린스타, 박지성, 박찬호 같은 선수를 육성하여 매니지먼트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젊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크고자 많은 협찬 속에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팅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1990년대 초에는 무대, 음향등 여러 가지를 하였다, 하루에도 여러 행사를 진행하였다, 한번은 잠실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체육대회를 진행하는 중 비가 오는 관계로 무리하게 무대를 혼자 철수 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관계로 허리가 삐끗하였고 그것이 나중에는 디스크로 돌아왔다. 난 1년 동안 허리 디스크에 고통을 겪으며 여러 곳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낳지 않았고 차에서 거의 누우면서 활동하였다. 수술받기 위하여 디스크전문병원 방지거병원에 입원하여 1주일 지나니 허리가 아프지 않아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1년 후 다시 재발하여 침도 맞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래서 수술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난 그때 서울 아산병원의 체육대회를 내가 진행 하고 있어 총무과에 아는 분들이 있었다. 디스크수술에 대한 사정애기를 하였더니 응급실에 입원을 하라고 하여 난 응급실에 입원을 하였으나 허리디스크는 응급실 대상도 아니고 레지던트들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하는데 있어 스트레스를 받아 한밤중에 집에 간다고 퇴원하였다고 일반병원에 입원하여 추석을 보내고 수술에 대한 갈등에서 마음의 결정을 하고 부탁하여 바로 입원을 토요일에 하였다, 일요일에는 잠실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체육대회를 누워 연출하고 들어갔다, 월요일 아침에 의사와 미팅하면서 수술을 언제 받느냐고 문의를 하였더니 MR촬영을 하여야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으니 부탁을 하라고 하여 나는 그날 부탁을 하여 그날 퇴근하는 직원을 잡고 MR촬영을 하였으며 그 주 목요일에 수술을 하였다, 의사마다 디스크 수술 후 3일 만에 걷게 하는 의사가 있고 1주일 만에 걷게 하는 의사가 있다, 내가 만나 의사는 3일 만에 걷게 하는 의사였다, 목요일 수술에 수술 받고 그 다음주 월요일에 걷게 되었으며 몇 주 휴식을 하여야 하지만 난 각서를 쓰고 금요일에 퇴원하여 토요일에 있는 코오롱체육대회 연출을 하고 잠시 설악산으로 요양을 하러 갔던 기억이 있다,

신촌문화축제를 하면서 25인승의 버스를 끌고 오면서 피곤함에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받고 앞바퀴가 빠져나가는 상황이 되었다, 사고차량은 레카차로 싫고 정비센타로 갔으며 난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새벽에 한양증권체육대회 관계로 사전에 잡혀있는 미팅 때문에 퉁퉁 부은 다리로 구두를 신지 못하여 다친 다리가 쑤시는 관계로 운전대에 올려놓고 운전하여 구두를 들고 맨발로 미팅을 하러 간 기억이 있다, 회사에서도 급하다고 맨발이라도 오라고 하여 진짜 맨발로 방문하여 미팅을 하였다. 난 오랫동안 태권도를 하면서 아프지 않은게 이상하였다, 매일 부딪치고 다쳤다, 그래서 웬만하게 아픈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그 때 관리 못한 것이 증세로 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2009년 문경전통찻사발축제를 함에 있어 행사 일주일 앞주고 나의 실수로 운동을 하다가 4월 23일경 다리의 아크래스건이 완전히 끊어 졌다, 그 다리로 나는 절뚝거리면 문경찻사발축제를 모두 끝내고 그 외 행사도 진행하여 갔다, 그 해 태백산 눈축제 관계로 12월초에 하얼빈 눈조각가를 초청하기위하여 출장 갔다가 12월 4일에 돌아오면서 12월5일에 수술을 받았다, 12월 15일경 억지로 퇴근하여 태백눈축제 추진위원회분들을 가이드 하여 12월말에 하얼빈 빙등제의 안내를 다녀오고 1월에 중국국제전 눈조각의 작업을 진두지휘하며 술을 먹게 되니 매번 수술한 자리가 곪아 터져 부위가 많이 커젔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책임감과 정신력으로 버틴 세월 참으로 바보처럼 살아온 것 같다. 

 

18. 강풍에 트러스가 쓰러지기 직전

 

2004년 농업경영인대회를 안동 둔치에서 하게 되었다.

전국농업경영인 5만 명이 모이는 행사로서 농업인의 잔치이다 보니 전국에서 지자체 단체장들이 참여하고 지역구 국회의원과 많은 장관들이 참석을 한다. 대회는 2박3일로 진행된다. 넒은 안동둔치에 모두 설치하였고 날씨가 참으로 좋았다. 개막식은 저녁 7시에 진행되고 그 이후에 PBC 라디오 공개방송이 준비되었다. 맑은 하늘에 갑작스럽게 3시에 천둥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고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애드벌룬에 달린 슬로건이 무대 조명 트러스를 치면서 트러스가 반 정도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무대 주변의 사람을 물리고 119에 가서 크래인 2대를 불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크래인이 들어올 동선에 따라 의자 등을 치웠다, 잠시후 크래인 1대가 먼저 왔고 그 크래인으로 무너지고 있는 트러스를 바로 잡으며 약간 들어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잠시 후 크래인 한 대가 더 오면서 양쪽에서 잡게 하여 무대를 바로 세웠으나 전기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내린 폭우로 전선의 라인들이 모두 물에 잠기어 스위치를 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탭을 불러 보도블록을 깨서 배수를 만들고 물을 빼는데 열중하였다, 스탭과 절충하여 안전에 최대한 대비를 하고 폭우 쏟아지는 가운데 스위치를 올렸고 분위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리허설을 진행하였다, 트로스와 무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모두가 대호를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서울에서 내려오고 있는 방송팀도 현장의 소식을 듣고서 포기하는 마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나는 포기를 하지 않고 순서대로 차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두려움이 없다, 본행사가 진행되기 전 식전행사가 6시부터 진행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자리는 5천석을 배치하였다, 폭우는 내리고 있고 자리를 앉혀야 하였다, 어렵게 유도하여 거의 자리에 착석시키고 식전행사부터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질서였다, 난 많은 비서들과 기자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비 오는 과정에서 먼저 솔선수범 좀 보여 주라 절대로 VIP의전에 있어 우산을 씌워주거나 기자들께서 사진 찍느라 무대 앞을 어수선하게 만들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마이크를 잡었던 경험과 심리를 이용한 것이 주효하였다, 장관, 국회위원, 지자체 단체장 등 모두 우산을 쓰지 않고 축사 등을 낭독하였다, 폭우 쏟아지는 가운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감동이었다, 폭우 속에서 모두가 포기한 대회 질서정연하게 참여하여 진행되는 개막식이 너무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왔다,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개막식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비는 그쳤고 그때 안동시민까지 나오면서 공개방송 축하공연이 뚝방 등까지 5만 명의 꽉찬 상황에서 감격스럽게 모두가 진행되었다.

 

19. 돈과 사업보다는 작품연출을 시도하다

 

난 신촌문화축제라던가 그 외 행사에서 광고주와 약속한 것을 어겨 본적인 없다, 적자를 본다면 더 투자하여 작품으로 감동을 주고 내가 그만두는 방법을 택한다, 하나를 원하면 항상 둘을 주고자 한다, 총감독료를 받고도 예산이 없으면 총감도료를 재투자하여 하고 싶은 작품의 겪을 높여왔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대행사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부터 축제를 전문으로 하면서 업자가 아닌 작품을 먹고 사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적으로 이윤추구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가로 활동하기위해서는 수입이 너무 작다, 회사운영이 어렵다, 솔직히 돈도 벌고 싶다 그러면 사업적으로 접근을 하여야 한다, 돈이냐 명예냐, 사업이냐 전문가의 접근이냐 참으로 오랫동안 갈등을 하였다. 축제를 위해 20여년 동안 전국의 지자체를 매년 방문하면 스케치한 노하우는 축제가 어떻게 가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알게 되었다, 축제를 운영함에 있어 지역인프라를 육성하여 지역민이 만들어가야 하는 축제운영시스템이 되어야지 대행사가 참여하여 진두지휘하여 가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진정한 축제를 만들고 싶었다, 아쉽지만 돈보다는 축제의 본질적인 축제를 구성하고 운영하기위하여 나는 JB축제연구소를 설립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체제를 도입하여 만들어가고자 오늘에도 노력을 한다.

관의 축제 운영에 있어서 내가 개입하는 축제에서는 예산을 재배정하여 낭비성인 예산을 줄이고 실속 있는 예산을 편성하고 운영시스템을 현실적으로 바꾸어 가고자 컨설팅 및 총감독으로서 유도하고 실행한다, 때에 따라 예산이 부족한부분에 있어 내가 재투자를 하고는 한다, 그러나 본심은 나도 기본 돈은 벌고 싶은 게 현실이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20. 울산환경콘서트 

 

  난 한참 방송전문대행사로서 공개방송을 하고 있던 시절 1999년 울산매일과 원자력의 협찬을 받아 울산환경콘서트를 태화강 둔치에서 하게 되었다, 예산은 많지 않지만 최고의 작품을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그때당시 적은 예산으로 최고의 콘서트를 위하여 SBS Radio 제작팀과 15,000,000원에 공개방송을 하기로 약정하고 진행하였다, 원자력에서 TV녹화방송을 요구하여 그동안 같이 많은 공개방송을  하였던 인천방송과 함께 하고자 하였으나 지역의 방송사에서 TV녹화방송을 원한 관계로 SBS와 연관있는 울산방송(UBC)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 울산방송사가 개국한지 얼마되지 않는 시기라 야외 특집방송할 중계차부터 여러 가지로 여건이 되지 않은 시기라 방송을 같이 하고 싶지만 아직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통보에 의하여 울산 MBC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가수 섭외와 현장 연출은 SBS Radio국과 전국녹화 방송현장 중계 및 지역 녹화 방송은 울산 MBC와 하기로 한 것이다, 1999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최고롤 인기 있는 가수는 거의 섭외하여 출연을 하였다, 출연진을 보면 MC 이지훈, 이제니. 출연자 : 핑클, 유승준, 신화, 지누션, 코요태, 클레오, 박기영, 박상민, 티티마, O-24, 비쥬, 등 18팀을 출연시켜 5만여명을 관람시켰다, 울산광역시 탄생 후 처음으로 이러한 대형콘서트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출연진에 있어 1천5백만원을 가지고 이렇게 최고의 출연자를 섭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난 그때 당시 오랫동안 특집공개방송을 함께하여온 SBS 이재춘 PD와 우리 한번 작품만들어 보자는 의견으로 이러한 대형콘서트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본다. 우리는 작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남보다 낳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우